[Essay] ‘힙함’을 글로 배운 자의 ‘힙정’ 적응기
2020.08.27 12:00 광고계동향, 조회수:561
Essay 
글 이희정 빅밴드앤코 크리에이티브 솔루션 본부 CD
 
‘힙함’을 글로 배운 자의 ‘힙정’ 적응기
 
지난호엔 언택트 시대의 광고 적응 이야기였는데 이번에는 ‘힙정’ 적응 이야기입니다. 아직 언택트 시대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새롭게 적응할 거리가 생겨버렸네요. 제가 최근에 회사를 옮겼습니다. 그 위치가 대행 사로는 다소 특이하게 합정입니다. 지금 흥얼거리신 ‘아아아~ 합정역 5번 출구’ 아니고요. 7번 출구입니다. 저도 회사 위치를 듣자마자 처음 떠오른 생각이니까 부끄러워 말기로 해요. 유산슬 님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 니까요.
 
사실 전 합정에 대해 아는게 별로 아니 거의 없었습니다. 직장이 강남에 있다 보니 강북에는 광고주 출입이나 촬영이 아니고는 올 일이 없는 편이기도 했고요. 휴일에도 다리를 건너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특히 합정은 왠지 MZ 세대들과 힙스터 오브 힙스터들이 있을 것 같은 미지의 장소였습니다. 직업 특성상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는 강박은 있고 시간은 늘 부족하니 ‘합정의 힙함’을 주로 글과 유튜브로 배우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근무했던 강남구 일대에서 벗어나 합정에서 근무한지 이제 한 달 남짓입니다. 생활권이 달라 진게 뭐 그리 대단하냐 싶으시겠지만 저처럼 귀가 얇고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는 그래서 의외로 새털처럼 가벼운 사람에게는 커다란 차이와 변화가 느껴집니다. 주로 있는 곳이 어디이냐가 누구냐와 무엇을, 왜까지 영향을 미친달까요.
 
우선 공간. 아시겠지만 많은 대행사, 프로덕션, 후반 업체들이 강남구의 2~3블럭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에 한 번은 녹음이 하루에 2건 잡힌 적이 있었는데 두 녹음실이 걸어서 5분 거리라 한 쪽에서 마치고 바로 다른 곳에서 이어서 진행을 한 적도 있었죠. 두 건 다 빅 모델과 함께였는데 그녀들의 스케줄이 아니라 제 스케줄에 녹음 시간을 맞췄답니다. 물론 그분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을 거예요. CD 스케줄이 모델보다 우선이라니 웃픈 기억입니다. 또 한 번은 스틸 촬영 장소와 편집실이 걸어서 갈 거리에 있어 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한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집까지 강남이었던 시절에 는 새벽 2시에 편집을 보고 집으로 걸어서 퇴근한 적도 있었네요. 상당 기간 동안 회사와 업체들의 거리가 차로 10~15분 범위 안에서 지냈으니 일의 효율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농담 삼아 제가 다니던 회사의 최고의 장점이 후반업체 가기 편한 거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글로 적어 놓고 읽어 보니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는 건 아마 기분… 탓이겠죠.
 
이 한 달간의 근무 기간 동안 외부와의 회의 시간을 정할 때 리드타임을 조금 더 갖기도 하고 대면보다 언택트 회의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회의 준비를 더 꼼꼼하게 하게 되는 장점이 있더군요. 만나서 말로 할 때 놓쳤던 일들도 문서로 정리하다 보니 체크하기도 좋고요. ‘마음 만 급해서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가 줄었습니다. 물론 챙겨야 할 일은 늘었지만요. 사람의 차이도 있습니다. 솔직히 광고대행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끼리’ 많이 만납니다. 야근이 잦고 일정이 광고주나 다른 이슈로 수시로 바뀌는 대행사의 라이프스타일상 이제 남은 친구들도 대부분 업계 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학교 친구들이나 업계에 있지 않은 지인들과 약속을 미리 잡아 놓고 심지어 제시간에 맞게 스케줄을 잡고도 갑작스러운 야근으로 빠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죠. 그러다 보니 당일날 약속을 취소해도 이해해주는 ‘우리끼리’ 보는게 속이 편해지죠. 결국 만나서는 어느 대행사가 무슨 피티를 땄다더라, 누가 이동한다더라, 불행하지만 인원 조정을 한다더라, 우리도 유튜브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들. 일명 공장 이야기들이 대화의 중심입니다. 거기다 부동산과 건강기능식품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역시 서글픈데… 기분 탓입니다. 그렇고말고요.
 
합정은 출근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패션이 조금 다릅니다. 어느 날은 ‘오늘 페스티벌인가? 월요일 아침 9시에 마주친 이 세상 힙이 아닌 옷차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에 띄게 개성이 넘치는 옷차림도 보았구요. 촌스럽게 흘끗 주춤하는 건 저뿐이었네요. 회사 주변에 아기자기 특이한 샵들도 꽤 있습니다. 그저 외관과 디스플레이에 이끌려서 들어가서는 끝내 지갑을 열고 말았는데요. 뭔가 나른하고 장사에는 큰 뜻이 없어 보이는 애티튜드에 왠지 돈을 내면서도 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분하지만 너무 귀여운 것들을 파니 어쩔 수 없네요. 여전히 ‘우리끼리’ 만나게 되더라도 제가 나눌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듯합니다.
 
스카이라인과 풍경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강남, 특히 테헤란로에는 높은 건물들이 많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없지만 거리를 걷는다기 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이동을 주로 합니다. 저는 날이 맑은 날에는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곤 했었는데 그 때마다 주변에 걸리는 건물이 많아서 눈썰미가 좋으면 사진만으로도 대략 촬영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죠. 인간이 세운 건축물에 오히려 밀리는 느낌이랄까요. 편리하기는 하지만 몸도 마음도 건조해지기 쉬운 환경이었습니다.
 
합정역 7번 출구부터 사무실까지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습니다.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식당, 가게들, 그 사이에 개발의 유혹을 피해 고집스럽게 자리 잡은 붉은 벽돌집들이 있습니다. 방향만 잘 잡으면 장맛비 사이 사이 맑은 파란색이 스며든 하늘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죠. 한 달 사이 몇 번 그런 하늘 사진을 찍었는데 앞으로는 식상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퇴근길에는 평일에도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커플들이 많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일터가 누군가에게는 연애의 장소가 되는군요. 다른 사람의 서사 사이를 거니는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공간과 위치, 마주치는 사람, 머리 위와 눈앞의 풍경이 다른 곳에 저는 적응을 하고 있습니다. 새삼 그동안 제가 아주 좁은 경계선 안에서 한정된 장소와 소수의 사람들과만 접촉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게 적응의 1단계이군요. 그리고 기분은 새롭고 좋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어느 기획 임원이 ‘늘 다른 곳으로 다녀라. 정해진 출퇴근길도 돌아서 다녀 보기도 하고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받아야 한다.’라고 조언을 주셨는데 최근에 잊고 있던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크리에이티브는 유튜브와 TV CF에서 찾는 레퍼런스 영상이나 책상 주변에서 나오는 게 아니죠. 뇌와 오감에 계속해서 새로운 인풋을 주고 축적하고 소화해서 목적에 맞는 아웃풋이 되게 해야 합니다. 회사 위치의 변화가 일하고 생각하는 방식에도 차이를 만들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달라졌고 선한 영향력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은 알아가는 단계이니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흥미로운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새 회사 위치를 알리자 지인들은 ‘합정역 5번 출구’ 드립을 날리며 이제 홍대, 연남, 합정은 저보고 책임지라고 하더군요. ‘힙함’을 글로 배운 저에게는 해맑은 그 생각이 벅찬 요구인 걸 알고 있을까요? 네이버나 인스타그램 검색이 더 빠르고 정확할 텐데요. 전 직장 팀원들에게 카페나 상점 사진을 찍어서 공유했더니 ‘힙정 클라스’라며 제게 이힙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합정과 저는 서로 알아가는 단계이지만 다각 도로 적응해서 힙정 이희정 선생이 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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