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비자발적 부캐 생성기
광고계동향 기사입력 2020.10.28 12:00 조회 512
Essay 
글 빅밴드앤코 크리에이티브 솔루션 본부 이희정  CD
 
비자발적 부캐 생성기
 
 
 
여러분은 지금 어떤 광고를 만들고 계시나요? 아무래도 TVC보다는 유튜브나 SNS채널에 올라가는 캠페인 기획과 제작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하는데요. 질문을 다시 해야 하겠네요. 지금 어떤 컨텐츠를 만들고 계시나요? 갈수록 미디어도 대행사도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죠. 그러면서 예산은…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영상촬영 때 한 편만 찍어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CD가 하고 챙겨야 할 일이 끝없이 생겨납니다. 이번 글의 제목처럼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맞춰서 어쩔 수 없이 저뿐 아니라 이 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본캐 하나만으로는 일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유느님은 유산슬, 유두래곤, 지미유까지 부캐마다 찰떡같이 소화하고 계시지만 저 같은 사람은 벅찰 때가 많습니다.
  
이희정 CD와 이희정 차장, 이희정 대리, 이희정 인턴까지 순간순간 소환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데요. 제가 신입사원일 때 CD님들은 출근도 늦게 하시고 낮술도 드시고 말도 없이 나가셨다 들어오시고 왠지 일을 많이 안하시는 걸로 보였는데요. 그래서 전 CD가 되면 편하겠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기억이 왜곡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 부캐가 각각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하나씩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다 저인데 다른 사람처럼 말하려니 헷갈리기도 하는데요.
 
먼저 제 부캐 중에 대리 카피라이터는 바디카피를 곧잘 쓰는데요. 요즘은 바디를 쓰고 연습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종대사에서도 최근 몇 년 간은 인쇄광고 카피를 거의 쓴 적이 없었는데 디지털 대행사로 옮기고 얼마 안돼서 신문광고 PT를 하게 되었어요. 사실 당시에 기획에게 이야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습니다. 대기업의 기업PR광고였는데 PT가 된 건 기뻤지만 헤드라인만 정한 상태에서 출고 직전까지 바디카피를 수정하고 또 수정을 했었죠. 고생을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했지만 마무리가 되고 나니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신문광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싶어서요. 팀의 아트에게는 갱지 교정을 내보는 그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며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고 이야기 했지요. 몇 년 만에 교정지를 보면서 디지털 대행사에서 신문광고라니 뭔가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디카피를 쓸 줄 아는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요. 사원 카피라이터 부캐가 주로 하는 일은 퍼포먼스 카피에 대한 고민입니다. 퍼포먼스 카피를 쓸 일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워낙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라 사원이 하기에는 벅차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유행하는 말만 적용해 쓰다면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하기도 어렵고요. 한동안 싹쓰리와 가짜사나이가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였는데요. 쉽게 눈에 띄고 싶어서, 귀에 걸리고 싶어서 쓴 카피가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광고를 만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유행어를 쓰더라도 절묘해야 하고 고민의 흔적이 들어가야 하고요. 가끔 보면 말만 있고 내용은 없는 카피도 보이더라구요. 저는 사원 카피라이터가 표현은 가볍게 하되 고민은 무겁게 했으면 합니다. 제가 욕심이 많네요. 욕심이!
  
또 다른 부캐인 인턴은 트렌드 수집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20대는 뭐하고 노는지, 요즘 핫한 밈은 무엇인지, 유튜버는 누가 뜨는지, 힙스터들은 어디를 가는지, 신조어 테스트도 하고, MBTI별 특징도 알고 있으려고 해요. 틱톡도 가입하고 ‘네고왕’이랑 ‘시즌비시즌’이랑 카카오TV 오리지널 컨텐츠도 찾아보더라고요. 근데 이 친구 인턴 치고는 나이가 좀 있어서인지 아니면 트렌드가 워낙 휙휙 바뀌어서인지 뭐 좀 적용해 보려 하면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되기도 하네요. 10대, 20대들에게 요즘 핫한 게 뭔지 물어보면 쉽게 대답을 못한다는데 그 이유가 그들이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들이 전부 핫하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니 따로 찾아서 보고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은 쉽지 않겠지요. 노오력이 아니라 숨쉬듯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차장 카피라이터 부캐는 혼자서 웬 만한 프로젝트는 맡아서 할 수 있습니다. 괜찮게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디지털 대행사에서 일하면서 TVC과 바이럴 영상 몇 개를 한 번에 진행하려니 프로젝트 사이를 오갈 때 버퍼링이 생기곤 합니다. 15초든 2분 30초든 컨텐츠로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야 하겠지만 15초 문법과 장초수의 차이는 분명히 있으니까요. 후크성 키워드를 중심으로 긴 초수의 스토리텔링 아이디어를 내다 보면 15초의 강력한 한 줄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TVC 아이디어에 집중하다 보면 분명 장초수의 컨텐츠 아이디어를 낸 건데 ‘너무 ATL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저는 차장 카피라이터 부캐가 그 전환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본캐인 CD는 어떨까요? PT도 하고 현업도 하고 PPM 준비 체크하고 촬영장에 가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기도 하지요. 촬영장에서 끝까지 집중하는게 또 은근히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다 같이 보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하는데 어느 순간 CD만 모니터 앞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편집실, 녹음실에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도 하고요. 그러는 한편 제 속의 여러 부캐들에게 업무를 분배하고, 채찍질을 호되게 하며 다른 조직원들의 관리도 합니다. 회의도 많으니까 스케줄링에 신경도 써야 하지요. 제가 있는 빅밴드는 커뮤니케이션 영역뿐 아니라 커머스 영역도 하는데요. 커머스는 제가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분야이기도 해서 시간을 쪼개서라도 참여를 하려 하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브랜드와 제품 커뮤니케이션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직접 만들어보는 일을 해보고 싶더라구요. 하면 다 잘할 줄 알았는데 막상 참여해보니 제가 모르는 게 정말 많았다는 점도 깨닫게 되네요.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그들의 장바구니에 담긴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클라이언트들도 다르게 보이고요. 미안합니다. 안 보이는데서 욕도 하고 그랬어요.
 
앗, AE 성격의 부캐를 빼먹을 뻔 했군요. 연차가 저보다 어린 AE들과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럴 때는 흔히 말하는 기획적 마인드로 크고 작은 이슈에 대응해야 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 광고주들이 저를 보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럴 때면 자칫하면 말한마디가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으니 더 조심스러워 집니다. 원래도 소심한 성격인데 돌아서서 ‘입이 방정이네 그냥 못한다, 안된다고 할 걸’이라고 후회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세상 일 저 혼자 다하는 것 같으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영역이 모호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 것뿐이지요. 거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고요. 저는 부캐들이 그닥 잘하지는 않지만 제 주변에는 부캐가 본캐를 능가하는 뛰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 친구 중에는 미디어의 완전체가 있는데요. 종대사 미디어 플래너로 시작해서, 디지털 대행사를 거쳐 클라이언트까지 경험하더니 이제는 혼자서 TVC에서 디지털까지, 플래닝에서 바잉까지 혼자서 다 해내는 1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잘하니까 일하고 싶어하는 대행사들이 많더라구요. 같이 일하고 싶으시면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또 한 지인은 종대사 기획 출신인데 디지털 대행사를 경험하고 나더니 어떤 때는 CD 역할까지 하더라고요. 물론 그의 모든 일에는 기획이 바탕이지만 일의 성격에 따라서 촬영을 직접 진행해야 할 때도 능숙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감독까지 한다고 할지도요. 열정맨이라 저처럼 비자발적이 아니라 자발적 부캐가 여러 개인 사람입니다. 업계에 오래 계셨고 여전히 현역인 감독 한 분은 최근에 편집 기술을 익혀서 활용하시더라구요. 가벼운 예산으로 작업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늘어서기도 하지만 전에는 다른 스텝들에게 맡겨 놓았던 일들을 직접 하시니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시는 듯합니다. 요즘은 장비들도 가격도 성능도 좋아지기도 했구요. 감독님은 앞으로도 아주 오래 현역으로 일하실 것 같네요.
 
앞의 예와는 달리 비자발적 부캐 생성 중인 저에게 앞으로 또 따른 부캐가 생겨나게 될까요? 제 부캐들은 기능이 더 좋아질까요?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해내는 게 좋은 일일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어진 일이 점점 다양해지고 연차가 올라갈수록 더 많은 역할을 해내야 하는게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부캐가 생성되고 있나요?
 
광고계동향 ·  9/10월 ·  에세이 ·  부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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